지식은 사물에 담기는 순간 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난다. 부싯돌 하나, 장부 한 권, 컴파일러 하나. 먼저 배운 사람의 지식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이 집어 들고 쓸 수 있게 한 물건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지금 사는 세계의 많은 부분을 말로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잊었다.

도시와 법체계, 금융 상품, 과학 패러다임, 지도 위의 국경은 자연에서 발견한 사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를 말로 구상하고 논쟁했으며, 법과 기록으로 굳혀 현실의 제도로 만들었다. 언어가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 자체가 행위자가 되었다. 구축자들을 위한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구축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은 그대로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새로운 종류의 마음이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앞선 글은 지능이 실체가 아니라 척도이므로, AGI나 초지능으로 넘어가는 단 하나의 문턱은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 문턱을 되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이번 변화는 새 존재의 탄생보다 범위는 좁지만 어쩌면 더 낯설다. 가장 오래된 도구인 언어가 실행 능력과 결합한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다시 만드는 종

기원전 약 17,000년, 라스코 동굴 벽에 그려진 오록스, 말, 사슴의 구석기 시대 그림.

라스코 황소의 전당. 주어진 세계 안에서 그대로 살 수 없었던 생물이 벽에 새로운 세계를 그려 넣었다는, 가장 오래 살아남은 증거. (source)

인간은 주어진 자연에 몸을 맞추는 대신 주변 환경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우리는 겔렌이 말한 결핍 존재(Mängelwesen)다. 생물학적으로 한 환경에 특화되지 않은 대신 도구로 부족함을 보완한다. 세대마다 다음 세대를 지탱하는, 지식이 부호화된 인지적 활동 영역을 물려준다. 앙드레 르루아구랑은 그 궤적을 추적했다. 인간은 먼저 근력을 도구에 맡겼고, 이어 기억을 문자에, 추론을 계산에 맡겼다. 단계가 나아갈 때마다 생물학적 기능이 몸 밖으로 나왔다. 그 기능은 외부 세계에서 전승되고 개선되며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를 바꾼 수많은 도구 가운데 언어만은 특별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도구

기원전 196년, 상형문자,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새겨진 로제타석.

하나의 칙령, 세 가지 문자, 이천 년의 침묵. 로제타석은 잃어버린 문명을 다시 읽게 했다. (출처)

언어는 다른 모든 도구와 달랐다. 언어는 다른 모든 도구를 전달 가능하게 만든 도구였다.

손도끼는 보고 따라 하며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도끼가 작동하는 이유, 곧 파괴역학과 결의 방향, 타격 각도에 관한 지식은 언어가 있어야 사람과 세대, 대륙을 넘어 전해질 수 있었다. 마이클 토마셀로의 공유 의도성 연구는 인간 문화가 누적되는 까닭을 이 능력에서 찾는다. 상징적 의사소통으로 주의와 의도, 지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고 앞선 세대가 이룬 것 위에서 출발할 수 있다.

요컨대 언어는 지식을 옮길 수 있게 했다. 지식은 한 마음에서 다른 마음으로 전해지고, 처음 만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수백 년 동안 축적될 수 있었다. 문자는 그 범위를 넓혔고 인쇄는 더 멀리 퍼뜨렸다. 언어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기억은 몸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왔다. 한 사람의 뇌에 갇혀 있던 지식이 복제하고 배포하며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 인간은 비트겐슈타인이 아주 특별한 언어 게임이라고 부를 만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게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남긴 큰 통찰은 언어가 하나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규칙과 행위 방식, 결과를 지닌 게임이며, 그가 “삶의 형식”이라고 부른 맥락 안에 놓인다. 단어의 의미는 특정 맥락과 활동,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쓰임이다. “물!”은 요청일 수도, 경고일 수도, 과학적 분류일 수도, 퀴즈의 답일 수도 있다. 같은 단어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는 셈이다.

철학을 뒤흔드는 주장이었다. 단어의 참된 의미와 이름표 뒤의 본질을 찾으려던 수백 년의 시도가 허상을 좇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단어에는 고정된 본질이 없고 쓰임이 있을 뿐이다. 언어 게임이 바뀌면 쓰임도 움직이고 진화하며 늘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은 지식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점을 드러낸다. 의미가 쓰임이라면 지식은 언어 게임에서 둘 수 있는 여러 수, 곧 언어로 수행할 수 있는 행위의 집합이다. 우리는 그 행위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예측하며 다시 만든다. 물리학자의 방정식, 변호사의 논변, 엔지니어의 명세는 모두 *수행적(performative)*인 면을 지닌다. 겉으로는 세계를 묘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구성한다. 법률 계약은 의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를 만든다. 과학 이론은 패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패턴을 볼 수 있는 틀을 만든다.

언어는 언제나 지식을 담는 그릇 이상이었다. 언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매체였다. 다만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존재의 집(그리고 그 거주자들)

1512년,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중 일부.

말과 세계 사이의 간극이 두 손끝 사이의 간극으로 그려져 있다. 역사 대부분 동안 불꽃은 한 방향으로만 이동했다. (source)

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그는 1947년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선언했다. 언어는 현실이 인간의 의식에 모습을 드러내는 근본 매체였다. 세계는 언어를 거쳐 구조화되고 분류되며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주장에는 신학적 울림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세계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조는 언어적이며 말이 세계에 앞선다. 같은 패턴은 여러 전통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하고, 힌두교의 리그베다에서는 우주가 신성한 발화에서 나온다. 언어가 신성하게 여겨진 까닭은 현실을 구성하는 매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에 관한 가장 숭고한 설명조차 말과 사물 사이의 간극을 인정했다. 말은 강력해도 사물 자체는 아니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었다. 알프레드 코르지브스키의 유명한 격언은 언어철학이 마주한 이 한계를 포착한다. 상징은 현실에 대응하지만 현실을 직접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넬슨 굿맨은 세계를 만드는 방법들(Ways of Worldmaking)에서 우리가 상징 체계로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조차 세계 구성은 물질적 인과가 아니라 재현의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봤다. “다리”라는 단어를 아무리 써도 실제 강을 건널 수는 없다.

앞선 글에서 다룬 포퍼의 세계 3(World 3), 곧 객관적 지식은 실제로 존재하고 인과적 영향도 미치지만 물리적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중력에 대한 설명은 중력이 아니고, 다리의 설계도는 다리가 아니다. 데이비드 도이치는 좋은 설명에는 변화를 일으킬 무한한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틀에서도 그 힘은 늘 무언가를 거쳐야 했다. 지식은 이를 행동으로 옮길 의지와 능력이 있는 인간의 마음과 손을 지나야 했다.

선사시대의 구어에서 문자와 인쇄, 인터넷을 거쳐 오늘날의 인지적 행위·목표 추구자까지, 언어 기술이 발전하며 말과 세계 사이의 간극이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다섯 개의 막대로 보여 준다.

지금까지는.


말이 육신이 되다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인지적 행위·목표 추구자에게 *“양자 컴퓨팅을 설명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physics-intro.xyz에 배포해”*라고 지시하면, 시스템은 웹사이트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코드를 쓰고, 프레임워크를 고르고, 호스팅과 도메인을 설정한 뒤 애플리케이션을 배포해 실제 URL을 내놓는다. 말이 간극을 건넌 것이다. 언어는 가장 직접적인 의미에서 *수행적(performative)*이 됐다. J. L. 오스틴은 말과 행위(How to Do Things with Words)에서 이 개념을 설명했다. “약속합니다”라는 발화 자체가 약속을 만드는 경우다. 인지적 행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을 만들어”라는 발화가 실제 제작 과정을 시작해 물질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말을 행위로 바꾼다.

오스틴은 *진술적 발화(constative)*와 수행적 발화를 구분했다. 전자는 세계를 묘사하므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고, 후자는 어떤 일을 행하므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진술적 발화다. “이제 두 사람이 결혼했음을 선언합니다”는 수행적 발화이며, 적절한 맥락에서는 그 말을 하는 행위가 사회적 현실을 바꾼다. 묘사와 행위의 경계는 철학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흐렸다.

진술적 발화는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처럼 세계를 묘사하고, 수행적 발화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처럼 사회 현실을 바꾼다. 생성적 발화는 “physics-intro.xyz에 웹사이트를 배포하라”처럼 물리 현실을 바꾼다. 세 카드가 묘사에서 제작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보여 준다.

인지적 행위·목표 추구자는 말과 물질적 결과 사이의 간극을 거의 지워 버린다. 코드 해석기와 웹 API, 로봇 구동기, 제조 체계 같은 실행 능력과 결합하면 발화는 사회적 의미의 수행을 넘어 물리적으로 결과를 낳는다. 프롬프트는 새로운 유형의 언어 행위인 *생성적 지시(generative instruction)*가 된다. 말한 사람이 모든 단계를 직접 이해하거나 수행하지 않아도 자동화된 추론과 계획, 물리적 실행의 연쇄를 시작한다.

창세기와의 구조적 평행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다. 지성이 말하면 세계가 만들어진다. 말한 사람이 구성 요소를 손으로 직접 조립할 필요는 없다. 발화 자체가 의도를 물질적 현실로 잇는 인과 사슬을 시작한다. 신학이 신의 권능으로 여겼던 일을 공학은 이제 프롬프트를 입력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어 주고 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협업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테런스 타오는 최근 드워케시 파텔과의 대담에서 모든 지식 노동자가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이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주 강력한 AI 도구의 도움을 받는 뛰어난 인간에 의해 풀리는 모습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협업 방식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협업일 수도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인간 지성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수학자가, 이 도구들과 이루어질 협업의 형식 자체에 전례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기존 협업의 개선판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협업이라는 뜻이다.

타오는 그 비대칭을 더 설명했다. AI는 폭에 강하다. 수백만 개의 가설을 만들고 방대한 매개변수 공간을 훑으며 멀리 떨어진 분야를 연결한다. 인간은 깊이에 강하다. 오래 집중하고 판단하며 어떤 접근이 유망한지 감지하는 능력이다. 지금의 과학과 지식 노동은 인간이 가진 깊이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넓은 탐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비용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타오는 “하나나 두 개의 정말 깊고 중요한 문제보다, 탐구할 수 있는 매우 넓은 문제군을 만드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폭과 깊이를 두 축으로 삼은 2×2 행렬. 인간만의 방식은 깊지만 폭이 좁고, AI만의 방식은 폭이 넓지만 얕다. 두 축이 모두 높은 오른쪽 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협업의 영역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는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의 상전이다. 인간 지능을 떠받치는 도구와 관행, 제도의 생태계, 곧 인지적 활동 영역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능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변화는 문자의 발명만큼 중대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한의 시작, 다시

데이비드 도이치는 지식의 창조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거리가 멀어져도 효과가 반드시 약해지지는 않는 유일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초신성의 빛은 희미해지고, 이웃 은하에서 날아오는 퀘이사 제트도 한 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좋은 설명은 일단 만들어지면 원칙적으로 물리적 우주 전체를 바꿀 수 있다. 작고 따뜻하며 연약한 존재가 작은 행성에서 별의 온도에나 만들어지는 원소를 합성하고, 시공간의 극한 조건에서 작동할 기계를 설계하게 하는 힘이 지식이다.

도이치의 틀에는 두 기둥이 있다. 첫째는 계산 보편성(computational universality)이다. 원리상 계산 가능한 것은 충분한 시간과 종이만 있다면 인간도 계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이전 데이터에서 기계적으로 끌어낼 수 없는 새로운 설명을 추측하는 창의성이다. 인간의 지식 창조를 제한한 병목은 늘 두 번째 능력이었다. 원칙상 무엇이든 계산할 수 있어도, 새로운 설명은 한 사람의 뇌가 허용하는 속도로만 추측할 수 있었다.

인지적 행위·목표 추구자가 추측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추측은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다. 다만 검색과 종합, 시험, 형식화, 소통처럼 지식 창조를 둘러싼 기반 시설을 크게 가속한다. 타오의 표현대로 가설을 만드는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춘다. “인터넷이 소통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춘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빨리 배우는 존재가 된다. 도이치가 모든 진보의 동력으로 본 추측과 비판, 수정의 열린 과정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 변화는 겔렌이 묘사한 결핍 존재가 새로운 보완 수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번에 보완하는 대상은 물리적 약함이 아니라 인지적 유한성이다. 인간은 물리적 약함을 오래전에 도구로 보완했다. 이제는 한 사람의 뇌만으로 이미 만들어 놓은 복잡한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모두 기억하고 찾아내며 종합해 활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완한다.

르루아구랑은 1964년에 이를 내다봤다. 그는 이를 “두뇌의 외재화”라고 불렀다. 스티글레르와 매클루언은 그 대가를 지적했다. 모든 확장은 동시에 일부 능력을 잘라 내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무감각은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두 타당하고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따로 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식을 운반하던 도구인 언어가 세계에 직접 작용하는 도구가 됐다. 상징과 현실, 지도와 영토, 설명과 설명되는 사물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고 있다. 언어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언어를 입력받아 세계의 변화를 출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 달라졌다.

우리는 말로 새로운 세계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 글은 진화하는 도구들 시리즈의 세 번째 글이며, 도구, 지식의 물리적 구현체와 도구가 문명의 지능과 결합하는 7단계 과정의 뒤를 잇는다. 논의의 바탕은 무한한 지식 시리즈에서 다뤘다. 두 가지 엔트로피, 어둠과 싸우는 것, 두 개의 루프, ‘지능적’이라는 말을 바라보는 한 가지 유용한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