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 문장 여섯 개, 프로필 여섯 개. 문장이 넘어갈 때마다 다각형은 형태를 바꾼다. 단어는 바뀌지 않는다.

1877년, 영국 수학자 W. K. 클리퍼드는 작고 끔찍한 이야기로 한 에세이를 열었다.

한 선주가 이민선을 바다로 내보내려 한다. 그는 그 배가 낡았다는 것을 안다. 의심의 목소리도 들었다. 검사를 받을 비용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배가 이미 무사히 마친 항해들을 떠올리고, 불길한 예감을 밀어내고, 배가 버틸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는 부두에 서서 “자기 배가 철저히 안전하고 항해에 적합하다는 진실하고 편안한 확신”과 승선한 가족들을 향한 선의의 바람을 품고 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다. 배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가라앉고, 선주는 보험금을 수령한다.

클리퍼드의 요점은 그 남자가 사악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선주의 확신은 진심이었고, 그가 품은 믿음(belief)도 거짓이 아니었다. 클리퍼드가 고발하려던 것은 불충분한 증거 위에서 이루어진 믿는 행위 자체였다. 그는 그 잘못을 누구보다 단호하게 규정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불충분한 증거 위에서 무언가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 선주는 배가 항해에 부적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배가 항해에 적합하다고 믿고, 바로 그 믿음이 승객들을 바다로 보낸다.

우리는 거의 150년 동안 이 우화의 변주를 써 왔다.

오늘날 그 배는 병원 재입원 위험 모델이다. 선주는 모델을 만들어 배포한 임상팀이고, 승객은 모델이 30일 안에 재입원하리라고 판단한 결과에 따라 퇴원 계획과 후속 진료, 가정 방문이 달라지는 환자다. 모델에는 내면의 삶이 없다. 모델에 의존하는 임상의는 그 출력에 신뢰와 유보가 섞인 복잡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를 좀처럼 말로 드러내지 않는다. “고위험군”이라는 판정을 받은 환자는 그 분류를 자기 자신에 관한 사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델을 두고도, 자신을 두고도 영어 단어 believe를 쓴다. 그러나 같은 단어로 서로 다른 태도를 가리킨다. 한국어에서는 이를 ‘믿다’, ‘신뢰하다’, ‘…이라고 판단하다’로 나눠 옮길 수 있지만, 일상에서는 그 경계가 다시 겹친다.

이 글은 우선 영어 belief가 무엇을 숨기는지 살펴본 뒤, 그 구분을 한국어의 ‘믿음’에도 비춰 본다. 그 모호함이 전례 없는 속도로 중요해지는 이유도 함께 살핀다.


가장 위험한 말은 평범한 말이다

믿음은 그런 말 가운데 하나다. 너무 익숙해서 뜻도 정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태도를 한데 묶는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배에 탈지, 돈을 빌려줄지, 추천을 따를지가 달라진다. 믿음은 행동의 근거가 되지만, 그 근거의 성격은 경우마다 다르다.

어떤 분야에서든 가장 위험한 말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그 말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말이다.

다음 문장을 하나씩 읽고, 각 문장이 나타내는 마음 상태가 정말 같은 종류인지 살펴보자.

“나는 지구가 45억 년 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신을 믿는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고문이 잘못이라고 믿는다.” “그 여론조사를 믿나요?” “그 모델은 환자가 재입원할 확률이 73%라고 믿는다.”

영어 화자는 여섯 문장을 모두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 함정이다. 첫 번째는 반대 증거가 나오면 고칠 수 있는 잠정적 추정이다. 두 번째는 화자에 따라 신뢰나 정체성, 실존적 헌신을 뜻한다. 세 번째는 한 사람을 향한 관계적 태도다. 네 번째는 가치에 관한 태도다. 표현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이런 태도가 사실을 표상하는 믿음인지부터 논쟁한다. 다섯 번째는 서로 다른 질문을 한 문장 안에 겹쳐 놓는다. 여섯 번째는 내면의 삶이 없는 모델에까지 믿음이라는 말을 적용한다.

이 단어는 차이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늘 같은 현상을 보고하는 것처럼 작동한다.

언어학에서 거짓 동족어(false cognates)는 형태가 비슷해 보여도 어원과 뜻이 다른 두 언어의 단어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 용어를 비유로 쓴다. 영어 단어 belief는 한 언어 안에서도 서로 다른 태도를 같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두 사람이 같은 단어를 쓰면 같은 대상을 말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여섯 개의 독립된 차원

서로 다른 믿음의 성격을 분석하면 여섯 개의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축들은 서로 독립적이다. 어떤 믿음이 한 축의 어디에 놓이는지 안다고 해서 다른 축의 위치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조합이 똑같이 흔하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한 조합은 많다. 같은 믿음도 여섯 축의 어느 지점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축양극대표 사상가
1. 근거증거 ↔ 신앙클리퍼드, 제임스
2. 명시성명시적 ↔ 암묵적폴라니, 슈비츠게벨
3. 대상명제 ↔ 사람 ↔ 가치H. H. 프라이스, 표현주의자
4. 수정 가능성잠정적 ↔ 정체성 구성적콰인, 케이핸
5. 정서적 강도냉정함 ↔ 열렬함흄, L. 조너선 코언
6. 자발성자발적 ↔ 비자발적데카르트, 올스턴, 사르트르

육각형 레이더로 그린 믿음의 여섯 축. 각 살은 하나의 축이며, 가장자리에는 그 이름, 두 극, 그리고 논쟁과 연결된 준거 인물이 표시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으로 정리한 여섯 축. 축마다 양극과 철학적 계보가 있으며, ‘믿음’의 각 용법은 이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근거. 그 믿음은 현실과 어떤 근거로 연결되는가? 한쪽 끝에는 클리퍼드가 요구한 증거가 있다. 베이지안 인식론(Bayesian epistemology)은 이를 새 증거에 따라 갱신되는 확신도로 형식화한다. 다른 쪽 끝에는 신앙이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The Will to Believe)에서 논리적 증거가 결론을 강제하지 않더라도 종교적 문제에서는 믿는 태도를 택할 권리가 있다고 옹호했다. 실제 믿음 대부분은 그 사이에 있다. 이유와 모범, 신뢰와 전통이 뒤섞여 있어 하나의 인식론으로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명시성. 어떤 믿음은 말로 표현되지만, 어떤 믿음은 한 번도 명제로 떠오르지 않은 채 행동을 좌우한다. 마이클 폴라니는 암묵적 차원(The Tacit Dimension)에서 이를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라고 요약했다. 철학자 에릭 슈비츠게벨은 믿음을 행동·인지·경험에 나타나는 경향의 묶음, 곧 *성향적 프로필(dispositional profile)*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말로 한 보고가 가리는 현상까지 설명한다.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P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P가 아닌 것을 전제한 듯 행동할 수 있다. 이때 말로 밝힌 믿음과 실제로 작동하는 믿음 가운데 어느 하나만 곧바로 진짜라고 하기는 어렵다. 언어 모델이 무엇을 “믿는지” 물을 때도 이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대상. 나는 P라고 믿는다와 나는 너를 믿는다는 같은 종류의 태도가 아니다. 철학자 H. H. 프라이스는 1960년대에 이 차이에 주목했지만, 일상 언어에는 그 구분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영어의 believe in + 사람, 곧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태도는 believe that + 명제, 곧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믿는 태도와 다르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여러 명제에 대한 믿음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신뢰는 그 자체로 관계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고문은 잘못이다” 같은 가치 판단은 표현주의적 분석(expressivist analysis)에 따르면 애초에 사실을 나타내는 명제가 아닐 수도 있다. 대신 어떤 규범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 믿음이라는 말은 이처럼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

수정 가능성. W. V. O. 콰인은 주변부 믿음은 쉽게 바꿀 수 있지만 중심부 믿음을 고치려면 그와 연결된 생각 전체를 다시 짜야 한다는 믿음의 그물(web of belief) 은유를 제시했다. 정체성과 강하게 결합된 믿음을 바꾸는 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정하는 일과 맞닿는다. 예일대 심리학자 댄 케이핸은 이를 정체성 보호 인지(identity-protective cognition)라는 개념으로 연구했다. 믿음이 집단 소속을 드러내는 신호가 되면, 사람은 반대 증거를 믿음을 고치는 데 쓰기보다 정체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처리한다. 이 축은 근거 축과 독립적이다. 증거에 근거한 믿음이 정체성과 강하게 결합될 수도 있고, 신앙에 근거한 믿음을 정체성과 무관하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정서적 강도. 데이비드 흄은 믿음을 “현재의 인상과 관련되거나 결합된 생생한 관념”으로 정의했다. 여기서는 어떤 생각이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지는지가 믿음의 일부다. 베이지안 확신도는 믿음의 정도를 숫자로 나타내지만, 이 수치는 확률적 확신을 표시할 뿐 체감되는 강도를 재지는 않는다. 95퍼센트의 확신을 냉정하게 가질 수도 있고, 60퍼센트의 확신을 열렬하게 품을 수도 있다. 철학자 L. 조너선 코언은 믿음과 수용을 구분했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고 참처럼 느껴지며 강약이 있다. 수용은 추론을 위해 의식적으로 채택하는 전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두 경우로 나뉜다. 둘은 서로 다른 태도다.

자발성. 데카르트는 오류의 원인을 의지에서 찾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의지는 지성이 제시한 명제에 자유롭게 동의하거나 판단을 보류한다. 흄은 반대 견해를 취했다. 믿음은 느낌이나 정서처럼 생겨나는 것이어서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고 봤다. 윌리엄 올스턴은 비자발주의를 옹호하는 영향력 있는 현대 논증을 제시했다. 반면 사르트르의 자기기만(mauvaise foi)은 믿음 형성에도 깊은 자발성이 있다고 본다. 선택이 비자발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외면하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축, 각 축마다 최소 두 개의 극, 그리고 축들은 서로 독립적이다. 이진 수준에서만 보아도 단어 하나가 가리킬 64개의 구별되는 프로필이 생기며, 등급 값을 허용하면 그 수는 훨씬 더 커진다.


이 틀이 풀어내는 논쟁들

이것을 적용하면 어떤 모습일까?

수많은 칼럼을 낳은 설문 문항을 생각해 보자. 기후변화를 믿습니까?

이 문장은 적어도 네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묻고 있다.

  • 증거가 인간 활동에 의한 온난화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는가(축 1, 근거).
  • 그 증거를 제시하는 기관을 신뢰하는가(축 3, 사람과 기관에 대한 신뢰).
  • “기후변화를 믿는 사람”이나 “기후 회의론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가(축 4, 정체성 구성).
  • 그 답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인가, 정체성 보호 인지가 자동으로 이끈 것인가(축 6, 자발성).

가운데에 “기후변화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이 놓인 믿음의 여섯 축. 이 질문이 실제로 건드리는 근거와 대상, 수정 가능성, 자발성의 네 축은 빨간색으로 강조되고 명시성과 정서적 강도는 옅게 남아 있다. 통상적 개입은 근거를 겨냥하지만 실제 병목은 수정 가능성과 자발성에 있음을 표시한다.

케이핸의 경험적 연구는 흔히 알려진 설명을 뒤집는다. 케이핸과 동료들은 Nature Climate Change에 발표한 2012년 연구에서 과학 문해력과 수리 능력이 가장 높은 응답자들이 기후 위험을 두고 가장 양극화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후속 논문에서도 인지적 성찰 수준이 높을수록 양극화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커지는 같은 패턴이 나타났다.

더 나은 과학 소통과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데이터 같은 표준적 개입은 증거가 부족하다는 가정 아래 축 1을 겨냥한다. 그러나 케이핸의 연구가 가리키는 병목은 축 4의 정체성 표지와 축 6의 자동적인 정체성 보호 인지가 맞물리는 지점이다. 애초부터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증거를 더 제시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과학 소통에 적지 않은 자원이 투입되고도 변화가 작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입 자체는 타당했지만 잘못된 축을 겨냥했다. 이 틀이 기후 논쟁을 곧바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개입이 원리상 통하지 않는지 진단하고, 효과가 있을 법한 다른 방향을 보여 준다.

같은 문제는 법정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형법은 정당방위, 수정헌법 제4조 법리, 내부고발자 보호 등 여러 영역에서 “합리적 믿음”을 요구한다. 법학자 케네스 사이먼스는 위해를 당할 위기에 놓인 사람이, 법이 합리적으로 믿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내용을 실제로는 믿지 않았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적 기준은 위협이 임박하고 중대했는지, 사용한 힘이 그에 비례했는지,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에 대해 명시적이고 명제적인 판단이 형성됐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찰나의 대치 상황에서 사람은 이 모든 사실을 하나씩 판단하기보다 두려움과 훈련, 본능이 만든 암묵적이고 체화된 반응에 따라 행동한다. 이 법적 가정은 배심원이 사건을 심의할 서사는 제공하지만, 당시의 실제 인지 과정과는 맞지 않는다.

정당방위 기준에 대한 두 개의 겹친 프로필이 있는 육각형 레이더. 법적 허구 프로필(중립 잉크)은 명시성과 대상 유형 축에서는 낮고 자발성에서는 높아, 법이 그 사람이 믿었다고 요구하는 것을 부호화한다. 실제 순간 프로필(빨간색)은 명시성(암묵적), 강도(불타오름), 자발성(강제됨)에서 높아, 위협 아래에서 인지가 실제로 하는 일을 부호화한다. 두 다각형은 육각형의 거의 반대 영역을 차지하며, 법적 기준과 살아 있는 순간 사이의 간극을 시각화한다.


모호함이 현실의 문제가 되는 지점

이제 병원 재입원 모델로 돌아가 보자.

머신러닝(ML)에서도 믿음이라는 말을 기술적 의미로 쓰지만, 그 성격은 일상적 믿음과 크게 다르다. 베이지안 머신러닝에서 믿음은 각 가설에 확률을 부여한 분포다. 새 증거가 들어오면 베이즈 정리에 따라 갱신된다. 이때의 믿음은 증거에 근거하고, 수학적 대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명제를 향하고, 잠정적이고 냉정하며 비자발적이다. 사전분포와 데이터가 정해지면 사후분포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앙적 믿음은 대체로 신앙에 근거하고, 일부는 암묵적이며, 사람이나 가치와 관계되고, 정체성을 이루며, 열렬하고, 스스로 택했거나 신에게서 주어졌다고 여겨진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두 프로필은 거의 정반대다.

축베이지안 ML의 믿음신앙적 믿음
근거증거신앙
명시성명시적(수학적 객체)부분적으로 암묵적
대상명제사람 / 가치
수정 가능성잠정적정체성 구성적
정서적 강도냉정함열렬함
자발성비자발적(사전분포와 데이터로 결정)자발적으로 택했거나 주어짐

여섯 축 레이더 위에 그려진 두 프로필. Bayesian ML의 믿음은 육각형 중심 가까이에 모인 작은 다각형으로, 모든 축에서 낮다. 신앙적 믿음은 둘레에 가까운 큰 다각형으로, 모든 축에서 높다. 두 다각형은 공간의 반대쪽 모서리에 놓여 있다.

같은 단어, 거의 정확히 역상인 프로필. 표가 이것을 말해 주지만, 그림은 더 잊기 어렵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서는 혼란이 더 깊어진다. 임상의가 모델은 환자가 재입원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려고 만든 인지 어휘를 그런 마음의 구조가 없는 시스템에 덧씌우게 된다. 머리 섀너핸은 LLM을 의인화하는 이런 표현이 널리 쓰이며 체계적인 오해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모델은 가중치로 구성되고 토큰의 연쇄를 출력한다. 이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줄임말이 아니라, 그 출력을 인간의 믿음과 같은 범주에 넣는 일이다. 그 순간 시스템에는 신뢰와 확신, 의도와 책임이라는 의미까지 따라붙는다.

최근 연구는 이 문제의 중대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번스와 동료들은 언어 모델의 활성화에서 “잠재 지식”을 찾아내는 방법을 개발했다. 모델 내부에는 부호화되어 있지만 텍스트 출력과 어긋날 수 있는 내용을 찾는 것이다. 이 틀로 보면 암묵적인 모델의 믿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 곧 축 2를 따라 이동하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폴라니가 인간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지적했듯, 언어 모델도 토큰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패턴을 가중치에 부호화한다.

앤트로픽의 회로 추적 연구는 대규모 언어 모델이 자신의 추론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 실제 내부 메커니즘과 자주 어긋난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같은 연구는 아첨하는 답변을 늘리는 패턴을 비롯해 모델 행동에 영향을 주는 170개 이상의 감정 유사 활성화 패턴도 확인했다. 축 5의 정서적 강도와 기능상 비슷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런 패턴은 모델이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층위에서 믿음의 표현 방식을 바꾼다.

모델은 어떤 것을 가중치 안의 신뢰할 만한 패턴으로 부호화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믿는”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언어 출력으로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믿음의 두 의미는 같은 축 위에서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언어 모델이 말로 밝히는 믿음과 실제로 작동하는 믿음이 나란히 모델 행동으로 이어진다. 위쪽에는 자기보고와 텍스트 출력, 진술한 입장이, 아래쪽에는 가중치 구성과 회로 활성화, 감정 유사 패턴이 놓여 있다. 두 의미는 명시성 축의 반대편에 있지만 같은 출력에 관여한다.


문제의 작동 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역사의 대부분 동안 믿음의 여러 뜻을 혼동한 대가는 천천히 나타났다. 철학 논쟁은 수 세기 동안 이어졌고, 정책은 기대에 못 미친 채 조용히 사라졌다. 법적 기준은 피고인이 실제로 형성하기 어려운 인지 상태를 요구했지만, 법 체계는 대체로 그 간극을 견뎠다. 클리퍼드와 제임스의 논쟁도 거의 150년 동안 계속됐다.

언어 모델은 이 혼란이 퍼지고 작동하는 속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이제 회의를 예약하고, 메시지 초안을 쓰고, 구매 결정을 내리는 자율 에이전트로 쓰인다. 각각의 행동은 모델의 매개변수에 부호화된 패턴에 근거한다. 우리는 그 패턴을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는 합의가 없다. 형식적인 문체가 더 권위 있어 보인다는 경향은 명시적으로 진술된 적이 없어도 모델이 쓰는 문장마다 영향을 준다. 특정 인구통계학적 특징에 예측력이 있다는 경향도 모든 추천에 스며든다. 사람들은 그 출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출력에 담긴 방향성을 합리적인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정보를 검색해 보여 주는 시스템과 달리, 에이전트 시스템은 내부에 부호화된 표상에 근거해 행동한다. 그 행동에 의존하는 사람은 밑바탕의 가정을 의사결정의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오늘날 다시 나타난 클리퍼드의 선주다. 이제 문제는 한 사람이 한 가지 믿음으로 배 한 척을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중치에 부호화된 수많은 작은 가정이 에이전트의 행동을 떠받치고, 그 출력에 의존하는 이용자와 운영자를 통해 다시 퍼져 나간다.

여기에는 정확한 역설이 있다. 이해 없는 활성화는 문명을 움직여 온 힘이다. 약리학을 몰라도 항생제를 복용할 수 있고, 소수의 전문가가 부호화한 지식을 수십억 명이 활용한다. 다만 여기에는 늘 조용한 전제가 있었다. 그 지식을 이해하는 존재가 어딘가에는 있다는 전제다. 환자가 몰라도 약리학자는 분자를 이해했다. 모델의 믿음은 이 전제를 흔든다. 가중치에 부호화된 방향성을 모두가 활용하면서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 모델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문명을 끌어올린 메커니즘이 이제 문명의 지식 체계와 인식론적 기반을 위협한다. 이해가 과정에서 완전히 빠진 채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델 가중치에 인코드된 암묵적 믿음이 회의 예약과 메시지 작성, 구매 같은 에이전트 행동으로 퍼지고, 그 행동이 요청자와 수신자, 운영자에게 전달된다. 이들이 받아들인 배경 전제는 다시 다음 학습으로 되먹임된다.

해석 가능성의 문제는 이미 내려진 결정을 어떻게 설명할지 묻는다. 믿음의 문제는 어떤 확신이 수많은 결정을 조용히 떠받치고, 에이전트와 그 이용자의 상호작용을 거치며 퍼지는지 묻는다. 아직은 언어 모델의 믿음을 식별하고 점검하며 선별할 도구조차 없다. 여섯 축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어느 차원을 말하는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모델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은 제대로 성립한 질문조차 아니다. 답할 수 있는 질문은 더더욱 아니다.


작은 습관

실천적 해법은 아주 작은 습관에서 시작한다. 믿음이라는 말을 쓰거나 들을 때마다 지금 어떤 의미의 믿음을 말하는지 물어보자.

증거에 근거하는가 신앙에 근거하는가? 명시적인가 암묵적인가? 명제와 사람, 가치 가운데 무엇을 향하는가? 잠정적인가 정체성을 이루는가? 냉정한가 열렬한가? 자발적으로 택했는가 저절로 생겨났는가?

대부분의 맥락에서 여섯 항목을 모두 특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떤 차원이 중요한지 물으면, 한 단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쓴 데서 생긴 겉보기의 충돌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 관점에서 클리퍼드와 제임스는 같은 종류의 믿음을 두고 의견을 달리한 것이 아니다. 기후 과학 소통의 주류와 기후 회의론자들도 같은 의미의 믿음을 놓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 가능성”을 요구하는 XAI 연구자와 모델의 추천을 신뢰해도 되는지 묻는 임상의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구분법은 이 시리즈 안의 긴장도 풀어 준다. 믿음의 주체성은 나는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같은 믿음을, 증명돼서가 아니라 유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여 보라고 권했다. 클리퍼드의 격률은 이를 금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 믿음을 여섯 축 위에 놓으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선주의 확신은 외부 세계에 관한 명제였고, 타인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되돌릴 수 없는 행동의 근거가 됐다. 따라서 충분한 증거가 필요했다. 자기 효능감에 관한 믿음은 시험해 보고 버릴 수 있는 잠정적 작업 가설이다. 코언의 구분에 따르면 믿음보다는 수용에 가깝다. 유용한 것을 믿어라와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만 믿어라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경쟁 답안이 아니다. 서로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며, 믿음이라는 한 단어가 둘을 같아 보이게 했을 뿐이다.

인간의 추론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너무 익숙해서 뜻을 이미 안다고 여기는 평범한 말이다. 믿음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위험할지 모른다. 처음으로, 우리 대신 생각하도록 만든 시스템이 그 모호함을 대규모로 물려받고 있다.


이 글은 믿음의 주체성에 이어지는 ‘강력한 믿음’ 시리즈의 두 번째 글이다. 이 논의는 반 레이우언과 롬브로조, 코너스와 할리건이 각각 발전시킨 믿음의 다차원적 설명을 바탕으로 한다. 두 연구는 믿음을 여러 속성으로 이루어진 공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인다. 다섯 사례와 전체 참고문헌을 담은 더 긴 학술적 논증은 별도의 작업 논문에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