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트코인과 달러를 둘러싼 지정학에 관한 연재입니다. 오태민의 《비트코인, 그리고 달러의 지정학》(거인의정원, 2023)을 읽으며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아래 글은 원서의 논지를 따라 쓴 요약과 해설이며, 원문을 그대로 옮긴 번역문은 아닙니다. 2023년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권이었습니다.

1장: 지정학의 귀환

역사의 휴일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던 무렵, 스탠퍼드대학교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출간했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다룬 이 책은 내용만큼이나 제목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냉전 종식 뒤 서구 지식인 사회를 휩쓴 낙관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였다. 그 뒤 미국의 단극 체제가 이어진 시기를 두고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역사로부터의 휴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휴일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기가 닥치자 지정학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계몽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이성이 유럽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상적인 국제질서를 구상했다. 공화국들이 서로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국내외에서 투명하게 행동하는 자발적 연맹이 그 해법이었다. 전제군주와 달리 공화국 시민은 전쟁의 고통을 직접 감당하므로 전쟁을 피하려 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른바 역사로부터의 휴일 같은 조건에서라면 이런 질서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본 학자들도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명제 역시 이 시기 자유주의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1990년부터 2010년 무렵까지의 20년을 ‘역사로부터의 휴일’이라 부르는 까닭은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나 냉전 같은 대치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특징은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을 과거의 유물로 보는 분위기였다. 낡은 것으로 취급된 대상에는 국가 자체도 포함됐다. 국가는 지도에 경계를 긋고 세금을 걷으며 비자와 복지 서비스를 관리하는 행정 단위 정도로 축소될 듯 보였다. 특히 유럽연합 같은 국제기구를 운영하던 엘리트 관료들은 초국가적 관료제가 국민국가의 주권을 점차 넘겨받으리라 기대했다. 보편적 원칙과 합리적 절차가 국가의 폭력을 대신해 국제질서를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오늘날 그 약속은 예전만큼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가 국제질서의 핵심 행위자라는 사실을 끝내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 간 힘의 균형은 합리적 원칙뿐 아니라 강제력을 행사할 능력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역사의 휴일은 끝났고, 지정학의 시대가 도래했다

‘역사로부터의 휴일’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은 국제질서에 힘의 논리를 끊임없이 들이밀었다. 이제는 더 많은 나라가 전후 질서가 정해 놓은 경계 밖에서 자기 위치를 다시 정하려 한다. 기존 질서를 바꾸는 데 목소리를 내고, 때로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그런 역할을 요구받기도 한다. 모든 국가가 이미 정해진 규칙 아래에서만 움직인다는 전제가 한계에 부딪힌 셈이다. 기자 로버트 캐플런은 《지리의 복수》에서 지정학의 부활을 냉전 이후 지적 흐름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한동안 뒷전으로 밀렸던 지리가 다시 국제정치를 읽는 핵심 변수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다.

나폴레옹은 한 나라의 외교정책을 알려면 그 나라의 지리를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로부터의 휴일 동안에는 인간의 이성이 지리의 제약을 넘어섰다는 믿음이 강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도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세계화가 지리적 장벽을 허물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실은 달랐다. 냉전 이후 첫 번째 지적 물결을 이상주의와 탈지정학이 이끌었다면, 지금은 현실주의와 지리가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세계는 평평하지 않으며, 미국조차 험준한 육지와 광대한 바다, 메마른 사막이 만든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정학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말은 이런 변화를 가리킨다.

2014년에 시작되어 2022년 전면전으로 확대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정학적 제약을 다시 실감하게 했다. 한스 모겐소 같은 국제정치학자조차 지리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관점을 경계하며 지정학을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정치든 지리든 인간의 이성으로 극복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이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력을 부정한다고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리와 정치가 얼마나 강하게 맞물리는지 살펴보는 일 역시 합리적 탐구의 대상이다.

현대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핼퍼드 매킨더는 20세기 초 유라시아의 ‘심장지대(heartland)‘를 중심에 둔 지도와 함께 다음 명제를 제시했다.

  •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대를 지배한다.
  •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자가 대륙을 지배한다.
  • 대륙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집착은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진과 냉전 초기 소련의 서진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중국도 중앙아시아의 심장지대 국가들을 향해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일대일로의 핵심 사업을 압축해 보면 현대 중국의 서진 전략이라는 성격이 드러난다. 과거 중국이 유라시아 초원과 교류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뻗어 나갔던 긴 역사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러시아 남서쪽, 중국 북서쪽, 독일 동쪽은 모두 매킨더가 말한 심장지대로 향하는 길목이다. 이슬람 문화권과 여러 민족이 만나는 곳이며, 종파주의와 민족주의의 긴장이 높고 석유를 비롯한 광물이 집중되어 있다. 열린 바다와 단절된 산악 지역도 많다. 바다가 먼 지역을 이어 주는 동안 산맥과 사막, 강과 숲은 이동과 교역의 장벽이 된다. 이 지리적 조건은 지역의 정치 공동체와 갈등 양상에도 오래 영향을 미쳤다. 지정학은 바로 이런 지리와 정치의 결합을 살피는 학문이다.

매킨더의 관점은 흑해, 중동,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줄어드는 지금 다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지리가 모든 결과를 결정한다고 보기보다, 국가의 선택에 지속적인 힘을 가하는 ‘지정학적 중력’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미국: 지정학을 이해하는 출발점

미국은 오늘날의 국제질서를 만들고 유지해 온 대표적인 해양 세력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육지는 크고 작은 여러 세력으로 나뉘었지만, 대양에는 오랫동안 단일한 질서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상인과 해적, 해군과 해양 강국이 항로를 두고 충돌한 끝에 한 국가가 세계의 바다를 압도적으로 순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영국이 바다를 하나의 질서로 묶기 시작했다면 미국은 그 작업을 완성했다. 공해는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아래 대륙을 연결하고 상품과 식량을 실어 나르는 기반이 되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마주한 미국은 영국과도 다른 조건을 지녔다. 이 질서를 떠받친 것은 국경 밖 세계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거리를 둘 수 있는 미국의 독특한 위치였다.

미국은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강하면서도 그 여파에서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세계질서의 심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 분쟁의 승패가 미국인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 무관심도 유지되기 어렵다. 이 관점에서 지정학의 시대는 세계의 바다를 순찰하는 패권국이 계속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역할이 사라지면 항로는 다시 해적, 사략 세력, 각국 해군이 충돌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지정학의 귀환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익숙해진 경제의 규칙과 작별할 가능성도 뜻한다. 그중 하나가 금리다. 미국이 보장한 질서 아래에서는 세계가 촘촘히 연결되고 미래를 비교적 예측할 수 있었기에 자본을 장기간 배분하기 쉬웠다. 구조적으로 낮은 금리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은 초저금리를 더욱 굳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2010년대 중반 금리 정상화를 시도했지만 부작용 때문에 후퇴했고, 팬데믹이 오기 전부터 다시 저금리 기조로 돌아갔다.

세계는 이미 낮은 금리에 깊이 익숙해져 있다. 소비가 경제를 이끄는 채무국 미국은 디플레이션보다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선호해 왔다. 달러가 미국의 통화인 동시에 세계의 결제·저축 수단이라는 사실도 미국의 차입 비용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지정학적 수요가 달러와 미국 국채의 가격을 지탱하면 채권 금리는 낮아진다. 그러나 이런 불균형도 무한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국제 분업과 해상 운송의 연결망이 약해질수록 자원과 상품을 옮기는 비용은 커진다. 이 변화는 장기간의 자본 배분 방식과 제로금리정책의 전제까지 흔들 수 있다.

달러를 통한 세계와의 무심한 관여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 시대에 달러 체제는 각국이 공통 규칙 아래 움직인다는 믿음을 지탱하는 핵심 제도였다. 여기서 달러 체제란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국제 금융·무역 질서를 뜻한다. 미국은 달러를 통해 세계 경제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기축통화 발행국의 특권으로 외부 충격을 일부 흡수한다. 신뢰도만 놓고 보면 스위스 프랑이나 일본 엔도 강한 통화지만, 세계 전체의 수요를 감당할 경제·금융시장의 규모는 달러와 다르다.

유럽 인근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중국이 위안화의 국제 결제를 확대하려 해도 달러 체제의 규칙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세계의 준비자산으로서 달러의 지위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2022년 금리를 올리자 세계의 개인과 기업은 자산을 달러로 옮겼다. 자본 유출을 막으려는 각국 중앙은행은 자국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미국의 긴축을 따라갈 압력을 받았다. 위기가 깊어질수록 안전자산으로서 달러를 찾는 수요가 오히려 커지는 역설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달러 질서는 변할 수 있다. 이 글이 주목하는 동력은 위안화의 국제화나 러시아·이란의 우회 결제망, 유럽의 초국가적 통화·관료 체제보다 미국 내부의 변화다.

미국이 게임을 뒤집다

퓨리서치센터와 미국외교협회의 조사에서는 국제 문제보다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미국인의 응답이 크게 늘었다. 자유무역이 미국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은 약해지고, 피해를 준다는 인식은 강해졌다. 이런 변화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세계에 확산해야 한다는 사명보다 국내의 안정적인 일자리와 생활을 우선하는 정치로 이어진다. 세계 문제에 쏟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힘을 얻는다.

한 나라의 통화가 기축통화가 되려면 환율 변화가 발행국의 국내 경제를 지나치게 흔들지 않아야 한다. 미국은 경제 규모가 크고 대외무역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이 조건을 잘 충족한다. 미국 정치도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세계질서를 설계하고 지탱하면서도 많은 미국인은 그 질서의 일상적 변화와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다만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테러와의 전쟁처럼 국제 문제가 국내 쟁점이 되면 사회는 크게 갈라졌다. 앞으로는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미국 국내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를 결과부터 거꾸로 보면 미국의 냉전 승리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가까스로 패배를 피했고, 베트남전쟁의 패배는 미국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공산권의 기세가 강해지면서 서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동맹국도 미국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었다.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에 우호적인 민족주의·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될 가능성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은 이 국면에서 게임의 판을 바꾸었다. 개별 전장에서 중요한 말을 지키는 체스식 경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영역에서 상대를 포위하는 바둑식 전략으로 옮겨 간 것이다. 중국과의 데탕트는 소련을 고립시키고 미국이 주도권을 되찾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글의 관점에서 냉전 승리는 압도적인 우위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경쟁의 규칙을 바꾼 전략적 유연성의 결과다.

이 대목은 비트코인에 관한 글의 주장과도 이어진다. 저자는 미국이 비트코인을 둘러싼 경쟁에서도 다시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거대한 국가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전략을 전환하고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능력이 미국의 힘이라는 해석이다.

중국과의 화해는 현실주의를 앞세운 소수의 미국 엘리트가 이끌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준이 다른 중국과 가까워지는 데 불편함을 느낀 미국인도 많았지만, 정부는 국가이익을 위해 관여 정책을 이어 갔다. 그 결과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안에서 성장했고, 동시에 그 질서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중국의 지정학적 행동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반대를 넘어 서구의 가치 체계와 주권국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과 그 원인을 둘러싼 불투명성, 시진핑 체제 아래 강화된 권력 집중을 그 인식 변화의 계기로 든다.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는 지금의 질서와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우려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 등을 통해 기존 질서에 더 적극적으로 맞서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현실주의 엘리트들조차 중국의 방향을 경계하기 시작한 시점에 팬데믹이 닥쳤고, 미중 간 지도력 경쟁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비트코인: 지정학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통화

국제통화체제는 지정학과 떼어 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의 체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그 뒤 미국이 주도한 국제질서의 산물이다. 유엔을 통한 국민국가의 협력, 브레턴우즈 체제, 달러의 우위, 자유무역과 항행의 자유가 그 토대를 이룬다. 국내에서 쓰는 법정통화에는 발행 주체인 국가가 있지만, 세계 전체를 다스리며 중립적인 국제통화를 발행할 정부는 없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이 스스로의 선택을 특별인출권(SDR) 잔액에 영구히 묶어 둘 가능성도 작다. 국제통화 질서는 중립적이고 고정된 장치가 아니라 국가 간 힘의 균형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적 질서다.

이 질서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국가들이 세운 임시 규칙 위에서 작동한다. 세계 무역은 지정학적 힘의 이동을 빠르게 드러내는 감지기이자, 각국이 경제력을 키워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경쟁 무대다.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의 중립성이 이례적으로 보인다. 비트코인은 어느 국가도 단독으로 발행하지 않으며, 합의 없이 규칙을 바꾸기 어렵다. 바로 그 특성이 공통의 주권자가 없는 국가 간 관계에서 하나의 타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비트코인이 역사로부터의 휴일을 연장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지정학적 충돌 속에서 개인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금융의 비무장지대가 될 가능성은 있다.


이 글은 책의 논지를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다시 정리한 글이므로, 요약이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질문이나 제안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 주세요. 원고를 교정해 준 에이미 준에게 감사드립니다.